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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16 23:29
[알렙] 자정무렵 나는 도망중 / 외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1,839  

난지도 풍경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지상으로 쏟아진 물들이 하나, 둘 모여 성난 군중처럼 바다로 행진했다. 강뚝은 경찰 바리케이트처럼 서 있었고, 그 안, 홀로 서 있던 나무가 물살에 버티며 몸이 휘어졌다. 며칠 동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선과 악중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구의 편에 서서 저 휘어진 생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가 8월과 맺은 약정은 뜨거워지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계약은 푸른 목숨이었지만, 나는 삶이었다. 갈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영원한 식욕, 내가 쓸쓸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정무렵 나는 도망중
 

1
목숨의 원형을 기억해, 온 몸에 풀 돋아, 영원과 불멸에 맞서 하루를 살아낸 기억들은 사납다. 잡은 너의 손들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울부짖고, 읽은 이 땅의 시선들은 무언가 되고자 발버둥거린다. 그러나 날마다 피워문 담배같은 날들, 매케한 진이 박힌 습관들이 혈관을 타고 돌 때마다 몽롱한 내가, 고꾸라지고 있다. 나는   

자정무렵 이 기억의 범위를 찢어버렸다. 어둡고 너무나 침침해, 내가 배운 독백은, 아름다워, 아름다워, 수없이 중얼거린 빈집, 육신이 두려워 문 열고 나간다. 굿바이 미스터 박, 굿바이 솔로, 나는 피 흘리며 도망중이다 평화를 갈망한다는 것은 이미 파괴를 알고 있었다는 슬픈 사실,   

2
에덴에선 아무것도 입지않아요. 덧 댄 것 없는 바람이 분다. 아흐, 아흐라, 모든 소리가 방언인 채 놓여있는 아카시아 숲, 두발 달린 짐승, 서성거린다. 걸어간 자리는 풀잎 하나 부러진 것 없고, 풀들은 몸을 일으켜 길을 지운다. 하늘에 걸린 붉은 달, 내려와 물 위에 머물고, 아무도 무덤을 만들지 않았고, 죽음을 추억하지 않는다. 아, 아 아슬한 가지끝 위태롭게 매달린 잉태, 욕망이 아름다운 꽃이 된다는 사실, 아카시아 향기 온 숲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이상도 하지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는 눈물,




장항에서의 하룻밤




다가 뭉클해 질 무렵이 저녁입니다. 
보세요.
여인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가로등 빛, 
쓸쓸함이 연거푸 서 있는 네개의 여인숙을 지나 항구로 갑니다.
그러나 보세요.
누구든 떠나보내지 못한 미련,  
끝내는 선창가에 목맨 목선 하나 물살에 흔들립니다.
아시는지요.
낮게 가라앉은 하늘가로 새떼를 날려보냈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날짜들
시간은 그렇게 뭉클해진 가슴 하나 남겨놓고
지나가는 저녁입니다.



철암역에서


누구나 그곳에 이르면 넘어가야 할 고개를 가슴에 지니게 된다. 이곳은 해가 아홉시반이 넘을 무렵 산을 넘어오고, 저녁이면 일찍 
세상의 어둠을 주고 가는 철암, 내게 글과 사진이란 또 다른 영혼과의 교류다. 글을 쓰고 사진을 담는다는 것은 가슴 속의 여백에  나의 영혼을 그리는 일이고, 그것은 말이나 시선이 아닌 느낌과 흐르는 교감으로 씌여진다는 것을 안다. 철암에서는 나의 아픈 쪽을 건들여, 내가 가진 다크블루의 색을 더욱 진하게 물들이고, 사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의 팔할이 누구는 바람이라 말했지만, 나는 길 위에서의 여정이라 말하고 싶다. 철암의 아침은 내 마음의 공터처럼 텅 비어 있었고, 간혹 공터의 놀이터, 낡은 그네처럼 트럭이 검은 대지 위에 놓여있었다. 안개가 산 위에서 내려와 가볍게 증발하는 철암의 아침, 그래, 원래 모호한 것이나 모호한 것들은 빛 속에서 사라지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각이고, 문명의 정의는 그렇게 이루어졌으나, 나는 아직도 태초의 웃음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안개의 시간이다. 모든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驛의 주변은 고요했고, 이미 떠나간 건물들이 폐허가 된 채 개천가에 서 있는 철암, 내 늙음이 저렇게 낡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폐허로 서 있고 싶지는 않다. 아무 기척도 없는 육신이란 얼마나 고요한 황폐일까. 나는 비록 낡은 육신 속에 여러개의 방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아프거나  쓰린 기억 조차 살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추억하겠는가그동안 내가 움켜쥔 것들을 세상에 다시 풀어놓는다. 그래, 우리 모두 갈망하는 사랑도 집착이다. 너와 나의 개인적 사슬이다. 잉태와 배반과 부활은 종교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땅의 풀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보라, 나의 지문은 그대의 기억 속에 묻어있고,  간혹 그것들은 잊혀진 페이지 같거나, 가을날이면 그대의 심장 근처에 부는 싸늘한 바람 같기도 하겠지만, 원래 지나간 기억들은  체온없는 나무들로 서서 앙상한 가지로 흔들리는 법, 그래, 누구든 객차에 한 때의 열정, 혹은 삶을 싣고 달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비록 그것이 고된 노동이었다 할 지라도 누구나 떠나간 驛舍를 가슴에 가지고 있어, 그저 돌아오지 못할 먼 기억들을 전송하며 만남보다는 이별에 대해 가슴 아파 하는 것이다. 샛강은 그런 침묵의 산에서 흘러나와 끝내는 그대와 그대의 사이를 지나가는 철암의 천변, 어느 것이 이 샛강에 몸을 담그어 젖지 않는 것이 있을까. 기억이란 늘 젖은 습자지에 씌여진 이땅의 기록이다 철암에서는 앞으로 찾아올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생애를 스쳐갔던 수많은 느낌들이 이 가을 찬바람 속에 다시 찾아들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모두들 희망은 미래의 힘이라 말하지만 진정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 희망보다 가슴에 이렇게 찾아올 역사를 하나쯤 마련해두는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그래야 따뜻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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