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갑선시인의 봉당에 있는 청서듦◎

 
 

  회원 : 0   비회원 : 3

오늘 : 13 어제 : 42
최대 : 498 전체 : 604,789


HOME > 문학의향기 > 추천시

 
작성일 : 09-09-28 15:12
[이정록] 구부러진다는 것 /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작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3,193  
주걱 / 이정록                                                         
 


주걱은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나무라면, 나도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나를 패서 나로 지은
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눈물 흘려보는 것. 참회도
필생의 바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뜨건 밥풀에 혀가 데어서
하얗게 살갗이 벗겨진 밥주걱으로
늘씬 얻어맞고 싶은 새벽,
지상 최고의 선자(善者)에다
세 치 혀를 댄다. 참회도
밥처럼 식어 딱딱해지거나
쉬어버리기도 하는 것임을
순백의 나무 한 그루가
내 혓바닥 위에
잔뿌리를 들이민다



城 / 이정록

오줌을 누다 보고 말았다
담쟁이 이파리가 끝내 가지려 했던 것
보고야 말았다, 城壁 틈바구니에
신방돌이며 맷돌이 박혀있었다
돌확이며 망주석도 어깃장 처박혀 있었다
제 집의 뿌리를 캐서 이고지고 온
사람들, 幽宅만은 안 된 다고 땅을 치던 사람들
담쟁이 넝쿨은 한사코 지붕을 얹겠단 건가
푸른 지붕 아래에다 이승과 저승 다 들여놓고
상석에 젯밥이라도 올리겠단 건가
맷돌의 퀭한 굇구멍이 손잡이를 가늠하는지
내 거시기를 훔쳐본다, 城이란
박복한 아낙의 광대뼈 위에
돌덩어리로 쌓아올린 눈물샘인 것을
하늘만 우러르는 우멍눈, 착한 돌눈썹인 것을
담쟁이는 짐짓 초록눈썹으로 덮어보겠단 건가
망주석 하나만 양기를 모아도
맷돌의 녹슨 중쇠가 암쇠 하나만 궁합을 봐도
우르르, 말발굽소리 들려올 것만 같은데


*굇구멍 : 창, 삽, 괭이, 맷돌 등의 자루를 박는 구멍 



갈대 / 이정록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一筆도 없이 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 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기차표를 끊으며 / 이정록

 

장항선에는 광천 역과 천안 역이 있는데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고요 천안에는 신부동이 있어요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는 지퍼의 손잡이처럼
그들 사이에 열차가 오르내리는데요
이들 둘의 사랑을 묶고 있는 장항선은
신부의 옷고름이자 신랑의 허리띠인 셈이지요

그런데 천안역은 이 땅 어디로든 풀어질 수 있구요
광천역은 오로지 신부동의 옷고름만 바라볼 뿐이지요
안타까운 신랑의 마음저림으로
광천 오서산의 이마가 백발의 억새 밭이 되고요
토굴 새우젓이 끄느름하게 곰삭는 것이지요

다른 역들은 잠깐만에 지나치지만, 천안역에서는
한참을 뜸들이며 우동국물까지 들이켜는 기다림을
신부가 알까요 호두과자처럼 작아지는 신랑의 거시기를 말이에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구요
천안에는 신부동이있지요
그 사이에는요 신혼여행지로 알맞은 온천이 있구요
예산에 가면 사과알 같은 부끄러움 주렁주렁하지요

수없이 오르내리는 마음이 절어서
선로에 검붉은 돌이 쏟아지지요
그 돌들이 다 사랑인 것을
철로 옆 소나무도 알고 있지요

억새꽃이 부케처럼 피어 있어요




도깨비기둥/이정록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

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하늘주소까지.


 

구부러진다는 것/이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작



나무도 가슴이 시리다/이정록


남쪽으로
가지를 몰아놓은 저 졸참나무
북쪽 그늘진 둥치에만
이끼가 무성하다

아가야
아가야
미끄러지지 마라

포대기 끈을 동여매듯
댕댕이 덩굴이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저 포대기 끈을 풀어보면
안다, 나무의 남쪽이
더 깊게 파여 있다

햇살만 그득했지
이끼도 없던 허허벌판의 앞가슴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가
갈비뼈를 도려낸 듯 오목하다



나무기저귀 / 이정록 
           

목수는
대패에 깎여 나오는
얇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

천 겹 만 겹
기저귀를 차고 있는,
나무는 갓난아이인 것이다

좋은 목수는
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내고
나무아기의 맨살로
집을 짓는다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어도 좋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어도 좋아라

목수가
숲에 드는 것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다

 
 

 
게시물 총59건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39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안갑선 07-29 2419
38 [오규원] 들찔에와 향기 / 외 안갑선 07-16 3123
37 [이생진] 벌레먹은 나뭇잎 / 외 안갑선 07-12 3580
36 [정지용] 향수 안갑선 06-27 1963
35 [강동수] 폐선 안갑선 05-31 1625
34 [신용목] 소사 가는 길, 잠시 안갑선 03-14 2118
33 [황병승] 멜랑꼴리호두파이 - 외 안갑선 03-14 4398
32 [서영식] 내객(來客) 안갑선 01-07 1756
31 [임보] 물의 칼 /외 안갑선 10-29 2885
30 [최창균] 오동나무 / 외 안갑선 10-06 1890
29 [이정록] 구부러진다는 것 /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수… 안갑선 09-28 3194
28 [김희업] 책 읽는 여자 (2) 안갑선 08-06 2925
27 [배용제] 꿈의 잠언 안갑선 08-01 2513
26 [정지완] 만월 안갑선 08-01 2161
25 [한혜영] 봄의 퍼즐 (1) 안갑선 07-31 1914
24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안갑선 07-31 3356
23 [김연주] 아코디언 연주자 -고양이 자세 안갑선 07-30 2865
22 [알렙] 자정무렵 나는 도망중 / 외 안갑선 07-16 1896
21 [나희덕] 길 위에서 (1) 안갑선 07-15 4385
20 [마경덕] 신발론 안갑선 06-23 3743
 
 
 1  2  3  
and 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