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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0-06 16:27
[최창균] 오동나무 / 외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1,890  
오동나무 / 최창균

 

더 큰 나무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면 허공이 움찔했다
나무가 떠받치고 있던 허공이 사납게 찢어졌다
잘 지냈던 허공과 떨어지지 않으려
몇번이고 나뒹굴다 결국은 아주 누워버렸다
밑동에서부터 둥글게 허공이 도려지는 순간이었다
허공이 떠난 빈자리에 새순이 불끈 솟아올랐다
돌아온 허공이 봉긋 부풀어오르고
나무는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이제
저 땅에서 걸어나온 시간만큼
나무는 자랄 것이지만, 방금
한 여자애가 태어나면서 쏟는 울음소리로
한껏 푸르러질 것이지만, 그럴 것을 믿는
그 집, 오동나무 집



개구리 울음소리  /  최 창 균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렸다 

어느 봄밤
물꼬 보러 눈둑길 들어서자
뚝 그친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려
고요의 못을 팠다 

한발 한발
개구리 울음소리 지워나갈수록
깊어지는 고요의 못에
내 생의 발걸음소리 빠뜨렸던 것 

나는 등뒤에서 되살아나는
개구리 울음소리 듣고는
불현듯 가던 길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내 고요의 못이 왁자하니 메워지는 소리 듣는다
비로소 내가 지워지는 저 개구리 울음소리

나는 그 논배미에서
벌써 걸어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개구리 울음소리는 줄기차게 따라와
내게 빠져 온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운다



진흙발자국 / 최창균

드디어 진흙발자국이 꽝꽝 얼어붙었다
진흙이 입 벌려 발자국 꽉 물고 있는 것처럼
나는 아픈 발자국 진흙에 남겨놓고 걸어나왔다
돌이켜보니 나는 저 족적으로
부단히도 삶을 뒷걸음질쳐왔다
지난봄 밭에다 씨앗 심을 때
논배미 모 꽂을 때 모두 뒷걸음질쳐야 했으니
초록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초록이 내 발자국 따라왔던 것이었으니
저 꽝꽝 언 진흙발자국은 초록데리고
봄으로의 진흙 속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으리라
그때마다 나는 밭이나 논배미에 나가
초록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놓곤 했었다
그렇게 입 딱 벌린 언 진흙발자국에다
내 아픈 발을 슬그머니 디밀어보았던 것,
진흙의 슬픈 국자처럼
내 꽝꽝 언 진흙발자국은
지금 초록을 떠내고 있는 중이다



손바닥 / 최창균


이 공손한 그릇
하나만으로도 나는 참 잘 살거라고
아주 적절히 마음 다해 오므렸다 폈다
받쳐든 것 쉬이 내려놓지 않고 감싸 쥔 힘
손바닥생명은 선 연장해 흘러갔다
내가 왜 손바닥에서부터 땀이 돋았는지
그 땀이 말라가면서 무언가 부단히 움켜쥐려 했던지
어느 날 공손히 벌린 가난한 손과
먼지 속에서 알곡 주워 든 손 떠올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 만나 덥석 잡았고 세차게 흔들었으며
손바닥손수건으로 얼룩눈물 훔쳐냈다
또한 얼얼하도록 마주쳐 얼마나 환호 했던가
스스로 어루만져야 하는 차가운 손바닥밥그릇
나는 오늘 기도하듯 포개어 생의 따스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햇볕 환한 집 / 최창균



햇볕 저리 좋은 가을날
햇볕이 아까워 아까워서 문 밖으로 나섰는데요
나서자마자 햇볕들이 따라붙었는데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햇볕들
줄줄이 데리고 들판에 다다랐는데요
내가 이 밭머리 저 밭머리 쓰다듬으니
햇볕들도 가만 있지 않고 들판에 볕이란 볕들
모두 불러모아 이밭 저밭 뛰놀고 있는데요
저희들끼리 마구 뒤엉켜 장난도 치고
고추며 참깨며 샅샅이 헤쳐보며 만지곤 하는데요
그럴 때면 내 마음의 화수분 같은 열매들
잘 받아먹은 햇볕으로 울긋불긋해지지요
그러니 온 들판이 붉거나 누렇거나 제 보란 듯하지요
집을 나설 때보다 더 새까맣게 탄 내가
햇볕들을 데리고, 우우우 울긋불긋 햇볕들을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어요
그러곤 널기멍석에다
그 많은 햇볕들을 몽땅 쏟아 부려놓았지요
그렇게 마당 환한 가을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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