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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0-29 01:17
[임보] 물의 칼 /외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2,885  
물의 칼 / 임보

 

대장간의 화덕에서 벼려진 굳은 쇠붙이만이
예리한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로 가슴을 베인 적이 없는가?

해협을 향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의 모서리가 아니라

몇 방울의 물

두 안구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방울도

사람의 가슴을 베는 칼이 된다.



맛 / 임보

관매도 매몰도 만재도 거문도
섬 좋아한 사람들 섬 얘기다
내가 보기에는 그 섬이 그 섬 같은데 하면
이 무식한 놈, 물소리 바람소리 안개며 인심이며
한 섬의 아침저녁도 한결같지 않거늘…
허긴 그럴 일이다

설렁탕 곰탕 육개장 국밥
음식점 진열장에 음식들이 즐비하다
한 끼 배부르기는 그것이 그것일 걸 하면
이 멍텅구리, 짜장면 하나도 그 맛들이 다 다른데
간짜장 옛날짜장 삼선짜장 모르냐?
허긴 그럴 일이다

춘자 옥자 명자 말자
여자들 좋아한 놈들 여인 편력 자랑이다
여자들 그것 다 마찬가지일 텐데 하면
이 등신아, 질고 마르고 물고 당기고
여자들 맛이 어찌 한가지란 말이냐?
허긴 그럴 일이다

소주 정종 배갈 양주
뭘 마실까 주태백이들 야단이다
뭘 마시든 취하긴 마찬가진 걸 하면
이 쑥맥아, 양주면 다 양주냐 위스키 브랜디
코냑도 코냑 나름, 나폴레옹 엑스트라…
허긴 그럴 일이다

그런데 어떡하지?
그 별미들 다 맛 볼 겨를 없으니
허기사 매일 먹는 밥맛도 다 모르고
한평생 데리고 산 아내도 채 모르거늘




도우미 / 임보

건강검진을 가서 검진표를 기록하려는데
도우미 아줌마가 자기가 써 주겠다고 나선다
보아하니 눈도 잘 보일 것 같지 않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모양이다

담배는 요?
피우다 끊은 지 20년이 넘습니다
술은 요?
하루에 소주 한 컵
한 컵?
(기록카드의 단위는 병인데 컵이라니 헷갈린 모양)
옆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도우미 여인이
한 병!
(이라고 거든다)
아니, 병이 아니라 컵인데
병보다는 컵이 작다는 생각으로 내가 항변한다
컵도 컵 나름이지 두 홉이야!
자신의 주량을 자신 있게 말하듯
도우미의 도우미가 지지 않는다

하기사 컵 하나 채워 놓고 절반쯤 마시다가
더 따르는 수도 있으니
그 도우미의 진단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셈이다



솔개 / 임보

솔개가 한 40년 살면
깃은 무거워 날개는 처지고
부리는 구부러져 가슴에 묻힌다고 한다.
그러니 높이 날기도 어렵고
사냥감을 물어뜯기도 힘들어
서서히 죽어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의지를 지닌 어떤 놈은 이때
높은 벼랑에 올라 환골탈태의 수련을 쌓는다.
제 몸의 낡은 털과 깃을 다 뽑아낸 다음
스스로 제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숴뜨린다.
그리고 한 반 년쯤 뜨거운 햇볕 아래
단식(斷食) 독공(篤工)의 고행을 쏟다 보면
헌 몸에 털과 깃이 새로 나고
빠진 부리의 자리에 새 부리가 돋는다.
그래서 다시 한 30년을 더 살게 된다는데

내 머리도 다 세고 이도 다 빠지고
팔다리도 힘을 잃어 휘청거리니
나도 어느 벼랑의 바윗돌 하나 얻어
한 달포쯤
헌 몸 비비고 머리도 부딪다 보면
혹 머리 다시 검어지고 이빨도 새로 돋아
흐린 눈도 맑아질는지

맑은 하늘에 높이 떠가는
한 마리 솔개를 본다




페미니즘 / 임보

 

여성이 약하다고 부르짖지 말라
세상에 약한 여성은 없다

어느 장군도
어느 제왕도
여성의 샅에서 태어나지 않는 자는 없다
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어떤 불경의 사나이도
밤이면 지어미의 다리 아래 엎드려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되고 마나니

근육질의 여성을 기르려는 욕망이여
부질없고 부질없도다
지배하지 않아도 세상은 그녀들의 발아래 있다

여성, 이 지상의 어머니들은
그가 만든 모든 인간들의 정결한 눈물로
꿈이 되고
사랑이 되고
신앙이 되고
가장 빛나는 별이 된다

태후이며 왕비인 여성이여
굳이 제왕으로 군림하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그대들의 손안에 있다




詩人論 / 임보 

 

한 소년이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름다운 노래 만들며 살아가는

제법 멋있는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한 청년이 또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과학자가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것까지 보고 가는

눈이 깊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한 장년이

그런 질문을 또 하기에

가난하게 살지만

세상을 여유있게 하는

다정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한 노인이 멈춰 서서
소매를 붙들고 또 그렇게 물었다,
‘정말 시인은 무엇하는 놈들이냐’고

‘죽음을 너무 일찍 깨우친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놈‘이라고
그의 막힌 귀에 대고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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