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갑선시인의 봉당에 있는 청서듦◎

 
 

  회원 : 0   비회원 : 4

오늘 : 15 어제 : 42
최대 : 498 전체 : 604,791


HOME > 문학의향기 > 추천시

 
작성일 : 10-03-14 12:47
[황병승] 멜랑꼴리호두파이 - 외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4,398  
황병승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para21>로 등단
시집 『여장 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1>-멜랑꼴리호두파이/황병승-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하고 말했다.
 


<2>-검은 바지의 밤/황병승-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 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3>-앵무새/황병승-


달빛은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주머니가 텅 비도록 지껄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떴고
등 뒤로 잎이 지고 있었다
곧 겨울이었다

무섭도록 쭉 뻗은 선로를 따라 걸엇다
덜컹거리는 정신을 목적지로 이끄는
이 긴 사상의 회초리
걸음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비둘기들이 구구 울었다
불 주위로 빙둘러선 늙은 사내들이
무질서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묵묵히 악수놀이를 햇다
분명 사람들은 아니었다 궁금한 건
겨울의 두터운 외투 주머니 속에는
모두 몇 개의 불이 담겨 있을까

여자는 오늘도 집에 없었다
한 잔 가득 찬 우유를 따라 마시고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코미디언의 한물간 제스처를 흉내내었다
거을 속의 남자가 빨란 루주로 x표를 쳤다
방 안 가득 어지럽게 널린 여자의 옷가지들
몸을 샅샅이 알아버린 뒤에
우리는 쉽게도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달력의 그림처럼 흔한 풍경이엇다
깜박 깜박 형광등이 변덕을 부리는 밤
벽지 가득 하릴없이 앵 무 새 라고 썼다
곧 겨울이었다
컹 컹 컹 어디선가 흰 이빨들이 날아와
베개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양이 짐보
 
                                                  황병승 
 
  내가 갸르릉 거리면요,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내 이름은 짐보 나쁜  친구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요 쥐
는 
  옛날부터 싫었구요 이 골목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세탁소집 아이는 미용사가  꿈이구요 열여덟에 결혼한 수리공
마키는 
  말할 때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고 대장장이 키다리는 
  아침부터 술이지요 

  내가 밤늦도록 갸르릉 거리면요, 
  당신이 천방지축 꼬마였을 때 내가 아프게 할퀸 적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시답잖은 얘기예요 고양이에게 왕국이니 전설이니…… 
  당신들 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내 이름은 짐보 
  지붕을 뛰어넘다 애꾸가 되었구요 동네  고양이들은 나를 점프
왕 짐보 
  그렇게 놀리더군요 나쁜 마음을 먹을라치면 벌써 먹었죠 
  우리 고양이들은 칼날 같으니까요 
  그러나 눈이 꼭 두 개일 필요 있나요 친구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들쑤시고 다니지 못해 안달을 하지만, 많이 안다고 
  다 아는 건 아니죠 내 이름은 그냥 짐보 이 골목만큼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죠 

  내가 만일 밤늦도록 갸르릉 거리면요, 
  당신은 아직 꼬마고 당신은 울고 싶은 일이 참 많고 
  그러나 그 모든 게 지난 밤, 짐보가 할퀴고 간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들 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게시물 총59건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39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안갑선 07-29 2419
38 [오규원] 들찔에와 향기 / 외 안갑선 07-16 3124
37 [이생진] 벌레먹은 나뭇잎 / 외 안갑선 07-12 3580
36 [정지용] 향수 안갑선 06-27 1964
35 [강동수] 폐선 안갑선 05-31 1625
34 [신용목] 소사 가는 길, 잠시 안갑선 03-14 2119
33 [황병승] 멜랑꼴리호두파이 - 외 안갑선 03-14 4399
32 [서영식] 내객(來客) 안갑선 01-07 1756
31 [임보] 물의 칼 /외 안갑선 10-29 2886
30 [최창균] 오동나무 / 외 안갑선 10-06 1890
29 [이정록] 구부러진다는 것 /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수… 안갑선 09-28 3194
28 [김희업] 책 읽는 여자 (2) 안갑선 08-06 2925
27 [배용제] 꿈의 잠언 안갑선 08-01 2513
26 [정지완] 만월 안갑선 08-01 2161
25 [한혜영] 봄의 퍼즐 (1) 안갑선 07-31 1914
24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안갑선 07-31 3356
23 [김연주] 아코디언 연주자 -고양이 자세 안갑선 07-30 2865
22 [알렙] 자정무렵 나는 도망중 / 외 안갑선 07-16 1896
21 [나희덕] 길 위에서 (1) 안갑선 07-15 4385
20 [마경덕] 신발론 안갑선 06-23 3743
 
 
 1  2  3  
and 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