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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8-28 02:47
[마경덕] 모래수렁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2,398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등





모래수렁 /  마경덕


 달리던 바람이 잠깐 몸을 눕히는 바람의 집, 사막을 떠돌다가 발바닥을 데인 바람이 마른 모래 속에 발을 묻은 곳, 이때 깊은 수렁이 생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바람들이 모여들면 사막은 바람을 매장하고 곳곳에 봉분처럼 사구(砂丘)를 쌓는다. 갇힌 바람은 지나가는 발소리를 끌어들여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죽은 척하는 流砂, 때론 회오리에 발려 기절도 하지만 지상으로 내려오면 곧 깨어난다. 전갈이 독침을 들이대도 눈알 한 번 굴리지 않고, 바람을 따라 꿈틀거리는 유순한 모래들.

 미세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流砂의 식사법은 천천히 진행된다. 비명을 낚아 챈 뒤 두 눈을 뜨고 제 죽음을 확인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오래된 그들의 식사예절, 질긴 낙타의 무릎은 정처없이 떠돌다 온 바람의 뼈를 닮아 가끔 목구멍에 걸린다. 낙타의 젖은 콧잔등, 어지러운 수화, 수천의 터빈을 순장한 유사는 늘 침묵한다. 마지막 유언조차 기록하지않는 것은 그들의 불문률

 바람의 혀가 닿아 죽은 자의 뼈에 구멍이 났다. 먼지기 된 뼛가루는 바람을 타고 그 무덤에서 나올 수 있다.





지문(指紋)

마경덕


  갓난아기가 젖을 빨듯, 어린나무도 허공의 젖무덤을 더듬어 나간다. 푸른 입술로 빛을 빠는 나무들은 허공을 짚으며 허리를 편다. 몇 벌의 그늘을 짓고 허공에 손자국을 찍는 사이 또 한 개의 나이를 허리에 둘렀다.

  언젠가 죽은 여자의 나이를 이(齒)가 말해주었다. 수없이 씹어 삼킨 시간의 지문들이 고스란히 담긴, 입속은 단단한 기억의 창고. 유치(幼齒)가 사라진 그 자리에 환생한 서른두 개의 치아들은 젖을 빨던 최초의 기억을 건네받았다.

  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 바람은 그때, 세상과 악수를 하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전봇대를 넘고 아파트와 가로수를 넘었는데 열 개의 지문이 찍혔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대추나무에게 손을 내밀 때 설익은 대추알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대추나무는 아직 바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 역시 두 손을 감추었다. 바람의 손이 내 손보다 컸기 때문이다.

  바람이 만개한 회화나무 가지를 만지는 순간, 허공에 희디흰 지문이 찍혔다. 수만 개의 지문으로 허공은 빽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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