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갑선시인의 봉당에 있는 청서듦◎

 
 

  회원 : 0   비회원 : 7

오늘 : 146 어제 : 216
최대 : 498 전체 : 508,253


HOME > 문학의향기 > 추천시

 
작성일 : 10-10-08 03:48
[최형심]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글쓴이 : 안갑선
조회 : 2,504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 최형심


빈집으로 바람이 부산히 출퇴근하는 동안, 오후가 조금씩 그늘을 입는 동안, 나뭇가지 끝에서 해체된 집들이 똑똑 물방울을 따먹는 동안, 막다른 골목을 노부부의 빈 수레가 걷어갈 동안,

버려진 목숨들이 서로를 보듬어 탑을 이루었다. 묻혀있던 봄 소매를 끌어당기며 노파가 쪼글쪼글 웃어 보인다.

백열등 아래 병아리 다리가 나오는 소리, 고드름이 몸을 내주는 소리, 유리벽 안에 붙잡힌 화분이 조용조용 나비문양을 그리는 소리, 가방에 햇빛을 가득 담고 개학식에 가는 아이들의 발소리,

노부부는 가슴을 들추어 소리를 꺼낸다.

가파른 골목 끝까지 번진 질기디질긴 겨울은 곧 그곳에서 철거될 것이다.



이제 육지는 나의 이름이 아니다  / 최형심


 침대위에 섬이 있다. 눅눅한 홑겹의 해안을 가진 나는 무인도. 창밖으로 지나가는 계절풍이 파도를 일으키고, 수위 낮은 잠으로 등부터 젖어드는 날엔 바다가 되지 못한 몸을 찢고 불면을 오려낸다. 지도의 모서리에서 밤이 사라지고 탈색된 흰빛의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한때 나는 맨발 아래 지구를 매단 적이 있다. 나를 밀쳐내고 갈 곳 잃은 골목, 그 도시는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은 양어깨만큼의 자유라고 오랜 유목의 습성은 담요처럼 몸을 말았다. 창밖으로 세상이 물길처럼 흘러가고 북회귀선이 어디쯤인지, 밤은 길을 몰고 가버렸다. 나는 낙타의 그림자를 가졌다.

 빛이 닿지 않는 이곳에는 심해어가 산다. 나의 목 아래 깊은 바다. 심연에서 퇴화된 눈이 홀로 별에 가 닿으면, 하나의 계절을 하늘과 땅이 나누어 가지리라. 긴 고백의 편지를 쓰다 말고 무채색의 수면이 흔들린다. 스프링이 출렁 파도를 만들고 시트에 젖은 잠들이 일렁인다. 계절이 내 머리 위로 통과한다.




거인의 정원 / 최형심


 나는 거인에 속해 있었다. 니체가 거인을 죽인 후, 20세기적 고통으로 더는 그를 정의하지 않는다.

 칠월이 해바라기밭을 지날 즈음, 한 줌의 머리를 잘라 거인을 추억한다. 촉촉한 실비가 이른 새벽을 걷어 가면 천장이 낮은 집 지붕 밑 그늘까지 하얗던 나날들. 잠자리가 그려 놓은 나른한 하늘 아래 초록거미의 여름이 엄지발가락에 닿곤 했다. 익명의 이별을 위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간이역이었던 곳, 문득, 푸른 스카프를 두른 여장사내가 기억을 놓친다.

 겨울이 드나들던 자리에서 한여름 한기에 발이 젖는다. 샛노란 레몬 달이 뜨면 신물나는 세상을 뒤로 걷는 사람들, 온몸을 흔들어 제 안에 쌓인 고요를 휘젓는다. 허기의 무늬가 둥근 파문을 일으키면 지난 밤 만났던 꽃의 이름을 더는 묻지 않는 풀벌레들이 작은 귀를 떼어낸다. 밤이 한 방향으로 몰려오고

 나는 내부로 들어가 공명한다. 너무 많은 사랑이 나를 죽였어. 콧등을 덮은 불빛에 얼굴을 잃었다. 살별을 벼리다 위험한 저녁이 내게 이르러서였다. 지금은 뼛속에 묻어둔 그 이름을 꺼내어 닦아야 할 때, 비망록을 꺼내 들며 타는 갈증으로 키 큰 해바라기 목을 친다. 꽃대롱이 떠받치던 하늘이 성큼, 비가 되어 쏟아진다. 어둠이 비에 쓸려 바닥에 고인다. 이제, 그 어둠을 찍어 거인에게 편지를 써야하리. 나는 오랫동안 절망을 만졌으므로 조금도 절망하지 않겠다.

 
 

 
게시물 총65건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65 [김종제] 바람의 고백(告白) 안갑선 03-22 802
64 [김왕노] 나팔꽃 필사본 안갑선 03-21 824
63 [이생진] 늙지 않는 아버지 안갑선 05-17 1100
62 [강정] 폭우 안갑선 04-13 2043
61 [고형렬] 고니의 발을 보다 안갑선 04-13 1791
60 [김나영] 활 안갑선 03-24 1687
59 [박후기] 애자의 슬픔 안갑선 03-11 1948
58 [문정영] 괄약근 안갑선 03-08 1854
57 [김륭] 늙은 지붕위의 여우비 처럼 안갑선 03-03 2178
56 [길상호] 너라는 소문 안갑선 03-03 1680
55 [권혁웅] 마다가스카르가 떠다닌다 안갑선 03-03 1507
54 [고영] 감염 안갑선 03-03 1532
53 [강영은] 바람의 금지구역 안갑선 03-03 1583
52 [박두진] 청산도 안갑선 03-01 5497
51 [오규원] 한 잎의 여자 1 2 3 안갑선 01-03 5706
50 [이기철] 추운 것들과 함께 안갑선 10-11 1950
49 [박미라] 우리 집에 왜 왔니? (5) 안갑선 10-10 2009
48 [홍일표] 수국에 이르다 (외 1편) 안갑선 10-10 1693
47 [유정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안갑선 10-10 1820
46 [최형심]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안갑선 10-08 2505
 
 
 1  2  3  4  
and or